[심재열 ] 사찰입지의 풍수지리적 분석 - 통도사 (2)

영측산 통도사

한국학회 승인 2020.10.02 16:19 의견 0

2. 창건 배경과 성격

가. 자장 율사에 의해 창건된 통도사

통도사(通度寺)는 불보종찰(佛寶宗刹)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15교구 본사이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慈藏) 율사(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중 정골(頂骨)과 지절(指節), 치아 사리 외에 직접 입었던 금란가사(金襴袈裟)를 봉안하고 있는 곳으로, 한국의 불지종가(佛之宗家)라고 할 수 있다. 통도사의 대표성이 부처님의 진신사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면,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金剛戒壇)은 통도사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통도사의 사명(寺名) 또한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출가하고자 하는 승니(僧尼)는 모두 이 계단을 통해 득도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다(爲僧子 通而度之).

둘째,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통도사라 이름하였다(通萬法 通衆生).

셋째, 통도사가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인도의 영축산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하였다(此山地形 通於印度靈鷲山形).

나. 연못을 메워 건설한 통도사

통도사가 위치한 곳은 원래 구룡(九龍)이 살고 있는 큰 연못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646년 자장 율사가 문수보살의 부촉에 의해 구룡을 퇴거시키고 연못을 메운 후, 그 땅에 금강계단을 쌓고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전통사찰 중에는 통도사와 같이 연못을 메운 땅에 건설된 예가 적지 않다. 해인사, 미륵사, 선운사, 유점사가 그러한 경우이다. 특히 연못에 살고 있던 아홉 마리 용을 몰아내고 세웠다는 유점사의 창건설화는 통도사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림 5-3] 1872년 지방도중 양산군

영축산 상봉으로부터 힘차게 흘러내린 영봉들은 남쪽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불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이르러 멈춘다. 통도사의 국세는 금강계단과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북쪽과 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과 서쪽에서 흘러드는 물줄기가 상로전 혈처(穴處) 앞에서 합수되는 곳에 일월 한문(扞門)으로 선자(扇子) 바위가 우뚝 솟아있다. 산문 입구에 여의주 봉이 있으며, 봉 앞에는 두 계곡의 물이 합수되는 용담(龍潭)이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통도사의 공간구성은 북쪽의 주산을 배경으로 [그림 5-4]와 같이 동서로 상로전과 중로전, 그리고 하로전으로 구분하여 각각 특징적인 공간을 구성하는데, 하로전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중로전은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그리고 상로전은 통도사를 상징하는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한다.

[그림 5-4] 통도사 배치도

하로전의 중심건물인 영산전은 석가모니와 팔상탱화를 봉안한 중요 당우이다. 영산은 석가모니가 󰡔법화경(法華經)󰡕을 설한 영축산의 준말로, 영산불국(靈山佛國)을 상징한다. 영산전은 이 영산을 사찰 안으로 옮겨, 그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게 한 것이다. 영산전은 전면 우측에 위치한 작은 연못과 잘 어우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

중로전의 중심건물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대광명전’이라는 이름은 비로자나(毘盧遮那)라는 말 속에 ‘광명편조(光明遍照)’의 뜻이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상로전의 중심인 대웅전과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곳으로, 통도사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갖는 건물로서 통도사의 혈처를 차지하고 있다.

금강계단 창건과 관련된 내용은 「사파교주계단원류강요록(娑婆敎主戒檀源流綱要錄)」과 「통도사창창유서(通度寺創刱由緖)」,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확인 가능한데, 이들 문헌은 금강계단이 서기 646년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藏舍利條)」에는 선덕여왕 때인 정관 17년(癸卯, 643)에 자장 율사가 당에서 오대산(五台山) 문수보살로 부터 모시고 온 불두골(佛頭骨)과 불치(佛齒),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毘羅金點袈裟) 한 벌과 불사리(佛舍利) 100립이 있었는데, 그 사리를 3분하여 일부분은 경주 황룡사탑에 두고, 일부분은 울산 태화사탑에, 일부분은 가사와 함께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에 두었으며, 기타는 소재가 정확하지 않다. 통도사 계단은 2층으로 상층 가운데에는 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석개(石蓋)를 안치하였다.”라고 한다. 이는 통도사 금강계단에 불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였다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자장율사가 세운 탑과 절은 10여 곳에 이른다. 울산 태화사, 자신이 머물렀던 원녕사, 양산 통도사, 경주 황룡사탑, 명주 수다사(현 등명락가사), 오대산 월정사, 정선 갈래사(현 정암사), 태백산 석남사, 언양의 압유사 등이 기록으로 전한다. 자장 율사는 자신이 관여한 모든 사찰에 탑을 세웠는데, 특히 수마노탑 같은 특수한 탑이나 9층 목탑 같은 대형 탑을 세웠다. 이것은 자장의 조탑 의지가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통도사는 평지형 왕경 중심 사찰에서 산록형 사찰로 변화해 가는 과도기에 창건되었다. 또한 입지성이 산이 가진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설명되었고, 통도사 역시 영축산에 대한 의미부여가 창건설화를 통해 매우 중요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불교는 우리의 전통 문화와 결합하며 발전해 왔다. 이것은 불교가 우리의 정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 중 풍수는 사찰 건립이 자연을 파괴하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과정으로서 진행되도록 하는 데에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이러한 풍수적 입지선정은 사찰 건축의 오랜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림 5-5] 금강계단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선종(禪宗)이 성립하던 당시부터 사원 택지법을 중심으로 풍수참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고 한다. 풍수는 중국의 불교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선종사찰지의 입지선정에 깊이 간여하였다. 풍수는 한국에서 온 유학승들에게 그대로 전수됨으로써 한국의 선종사찰입지에도 반영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전통사찰의 입지선정은 불교적 입지관과 풍수적 입지관의 조화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신라의 수많은 입당승들이 선법을 전래한 당나라 말기에는 이른바 강서지법으로 대표되는 형세풍수가 이미 강서지방에 유행하고 있었으며, 신라승의 대부분이 그곳에서 전심하였다는 점이다.

창건 당시 선종 계열의 승려들은 당나라에 유학하였는데, 풍수가 크게 유행하던 강서지역에서 주로 형세풍수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맥락에서 통도사 입지선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자장 율사의 풍수관에 대해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자장 율사 시대의 중국 당(唐)나라에서는 이미 풍수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장 율사 역시 중국 유학 생활을 통해 역시 풍수사상을 습득하였을 수 있고, 그렇게 습득했던 풍수적 논리에 입각하여 통도사의 입지를 선정했던 것일 수 있다.

형세풍수의 영향 아래 사찰의 입지는 풍수적 길지로 선정되었고, 공간구성 역시 그에 따랐다. 풍수는 전통사찰 건축에서 입지를 선정하고 가람을 구성하는 중요한 논리적 근거로서, 그 의미가 매우 컸다. 이와 같이 풍수 논리가 어떤 형태로 통도사의 입지에 반영되어 있는지,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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