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열 ] 사찰입지의 풍수지리적 분석 - 회암사 (1)

천보산 회암사

한국학회 승인 2020.10.03 11:47 | 최종 수정 2020.10.03 11:48 의견 0

1. 회암사의 연혁과 개관

우리나라의 산은 모두 백두산을 조종으로 한다. 백두산의 주맥은 백두대간을 타고 곳곳에 지기를 전달한다. 특히 한북정맥의 주맥은 추가령(599m)에서 서남으로 갈라져 백암산(1,110m)・양쌍령(686m)・적근산(1,073m)・대성산(1,175m)・수피령(780m)・광덕산(1,046m)・백운산(904m)・국망봉(1,168m)・강씨봉(830m)・청계산(849m)・운악산(936m)・죽엽산(601m)・도봉산(739.5m)・북한산(837m)・문수봉(727m)・백악산(342m) 등으로 이어지며 서울에 정기를 제공하고 있다. 회암사가 위치한 양주시의 주맥은 한북정맥에 해당하지 않는다. 양주시는 동쪽으로는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진행하는 천보산맥을 경계로 포천시와 접하며, 서쪽으로는 앵무봉(622m)・개명산(560m)을 경계로 파주시와 접한다. 남쪽으로는 노고산(456m)을 경계로 고양시와, 상장봉(534m)・만장봉(740m)을 경계로 서울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감악산(675m)을 경계로 연천군과 접한다. 그리고 중앙에는 도락산(441m)・불곡산(460m)・한강봉(436m)・일영봉(444m)이 있다. 천보산맥의 한 자락을 차지한 회암사는 자신만의 특징적인 모습을 고고하게 간직하고 있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281(회암동 산14번지)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회암사(檜巖寺)는 무학(無學) 대사가 거처하던 곳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에 “고려 명종 4년(1174년)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고려 중기 이전에도 회암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대덕 5년(1301)에 탄생한 보우(普愚) 화상의 󰡔원증국사탑명(圓證國師塔銘)󰡕에도 “회암사의 광지(廣智) 선사에게 출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지공(指空) 화상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지공 화상은 이곳의 지형이 인도의 나란타사(那蘭陀寺)와 닮았다고 평하기도 했다. 회암사는 보우(普愚) 화상이 출가하고 나옹(懶翁) 화상이 대오(大悟)한 곳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회암사는 천보산에 있다. 고려 때 서역의 중 지공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 아란타 절과 같다’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1372년 이곳에 나옹 화상이 머물면서 사세가 확장되었고, 가람의 중건 불사도 1376년 나옹 화상의 문도(門徒) 각전(覺田) 등에 의해 완료되었다. 그러면서 “집이 무릇 2백 62칸인데, 집과 상설이 굉장히 미려하여 동방에서 첫째였고,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한다.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는 지공이 회암사의 땅을 잡으면서 산수의 형상이 서축 란타사와 완연히 같다고 말했으니 복지가 될 것이 분명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부터 회암사는 고려 최고의 사찰로 부각되면서 국가와 왕족의 원찰(願刹)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국 유학에서 귀국하기 전에 나옹은 지공으로부터 “삼산(三山)과 양수(兩水) 사이를 골라 머물면 불법이 자연히 흥할 것” 이라는 수기를 받아 고려로 돌아왔다. 이 양수와 삼산 사이란 지공이 다녀간 회암사의 위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양수는 한강과 임진강, 삼산은 삼각산(북한산)을 뜻한다.

고려 말의 회암사는 전국 사찰의 총 본산으로 승려도 약 3,000명이 머물렀다고 한다. 특히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 대사와의 인연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무학대사의 스승인 인도 승려 지공(指空) 대사의 관심 하에 그의 제자 나옹(懶翁) 화상이 국찰(國刹) 규모의 대사찰로 중창했다.

나옹이 시작하여 고려 말에 완성된 회암사의 모습을 목은 이색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서 “총 262칸의 전각들로 이루어진 가람은 동방의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4.5미터)의 불상 7구와 1척(3미터)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나옹(懶翁) 화상은 공민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회암사를 중창했지만 공민왕이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자 시련을 겪게 되었다. 결국 나옹 화상은 남쪽의 한 사찰로 추방되던 중 신륵사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러나 엄청난 사리가 나오면서 나옹에 대한 새로운 추모열기가 고조되기에 이른다. 그 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세종 대에 효령 대군에 의한 불사가 진행되었고, 성종 3년(1472)에 세조비인 정희 왕후가 정현조(鄭顯祖)로 하여금 다시 중건케 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상소도 있었으나, 의숙 공주와 정현조의 사비로 이루어진다는 명분으로 중건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후 연산 대군의 불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회암사는 명맥을 이어갔다.

회암사는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스승이면서 나옹의 제자인 무학 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어도(御道) 유구가 발견된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회암사는 궁궐 건축과 사찰 건축이 혼합된 조선 초기의 특이한 가람배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왕궁에서나 사용되는 명품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조선 초기의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인 정희 왕후의 명에 따른 13년에 걸친 대중창(大重創)으로 인해 절이 크게 확장된다. 그 후 중종비(中宗妃) 문정 왕후(文定王后)에 의해 불교의 중흥이 도모되던 시기인 명종 20년(1565)에 회암사는 태종 대왕 능침사(陵寢寺)로서 보우(普雨, 1509-1565)와 함께 대설무차대회(大說無遮大會)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문정 왕후가 무차대회 전날 갑자기 서거하자, 보우 화상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회암사는 원인 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다. 황성옛터처럼 세월의 무상함만 더해주는 회암사지는 여러 면에서 풍수와 관련된 사찰입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많은 관심을 끌게 한다.

회암사에 대한 기존 연구는 회암사 입지의 발굴 관련 연구, 사탑 관련 연구, 건축 관련 연구, 부도 관련 연구 등이 있다. 고려 말에 전국 사찰의 총 본산이었고 조선 대에 들어와서도 무학 대사와 이성계가 머물렀던 왕실 사찰이었다가 그 후로 폐사가 된 회암사의 사찰입지가 갖는 특징을 풍수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현장조사와 문헌고찰을 통해 회암사 입지의 풍수적 특징을 살펴보고, 풍수지리적 시각에서 그것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사찰뿐만 아니라 전통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입지의 특징을 좌우하는 풍수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현재 회암사에는 고려 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보물 제387호 회암사지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 제388호 무학대사부도(無學大師浮屠), 제389호 쌍사자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부도(指空禪師浮屠) 및 석등, 제50호 나옹선사부도(懶翁禪師浮屠) 및 석등, 제51호 무학대사비, 제52호 회암사지 부도탑(檜巖寺址 浮屠塔), 민속자료 제1호 회암사 맷돌, 향토유적 제13호 회암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유물이 있다. 천보산 서남 기슭에 있는 회암사지((檜巖寺址)는 국가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26,400㎡(8,206평)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2. 창건 배경과 성격

회암사는 한국에 선종과 풍수사상이 유입된 이후인 충숙왕 15년(1328)에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 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지공 화상은 산수(山水)의 형세(形勢)가 인도의 아란타사와 같다고 하여 인도의 아라난타사를 본떠서 회암사를 창건했다. 회암사는 선종 사찰이라고 했지만 선(禪) 수행을 위한 사찰이라기보다는,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으로서, 그리고 공민왕의 왕사인 나옹 화상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왕실사찰로서 기능했다. 회암사의 가람구조를 보면 건축 공간구성 배치축의 가장 핵심적인 중점영역에 왕이 머물던 정청이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회암사가 지향하는 사찰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도 회암사는 불도를 닦는 사찰로서의 성격보다는 국가와 왕족을 위한 왕실사찰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다. 태조 이성계 시절에는 태조와 왕사 무학대사를 위한 사찰의 성격이 강했고, 태조 사후에는 왕실의 보살핌 속에 왕실의 복을 비는 기복사찰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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